네가 꾸는 꿈 속으로 들어가려고 네 잠꼬대에게 길을 물은 적이 있다 시린 몸을 뒤척여서 네가 덮은 것이 이불이 아니라 강줄기임을 알았다 감은 네 눈꺼풀 아래로 꽃잎도 아니고 금붕어도 아니고 새의 깃털로 채워진 강줄기가 흘러들고 있었다 혹여라도 너와 닮은 여자를 볼 때면 그 여자가 안보일 때까지 나는 몸이 얼어붙는 기후에 속해 있어야만 했다 불어간 바람을 따라 허공이 한 줄기 파였고 바람소리가 석순으로 자라났다 환한 빛에 이끌려 동굴의 입구로 나오면 추위 속에서 떨어온 나무의 시간만큼 나뭇가지마다 꽃송이가 발자국으로 피어나 있었다 내가 뒤쫓던 네 흔적은 떠나온 지 오래 될수록 가까이서 빛나는 향기였을까 헤어진 날 밤에 너는 함께 베던 네 방의 베개를 만리향 밑에 묻었다고 했다 덕분에 일만 시간이 지난 오늘..
만지지 않았소 그저 당신을 바라보았을 뿐이오 마주 볼 수밖에 없는 위치에 놓여 있었소 난 당신의 씨나 뿌리엔 관심 없었고 어디서 왔는지도 알고 싶지 않았소 말을 걸고 싶지도 않았소 우리가 태양과 천둥, 숲 사이로 불던 바람, 무지개나 이슬 얘기를 나눌 처지는 아니잖소 우리 사이엔 적당한 냉기가 유지되었소 문이 열리고 불현듯 주위가 환해지면 임종의 순간이 다가오는 것이오 사라질 때까지 우리에겐 신선도가 생명으로 직결되지만 묶고 분류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한 칸에 넣었을 것이오 실험해보려고 한군데 밀어 넣었는지도 모르오 당신은 시들었고 죽어가지만 내가 일부러 고통을 주려던 게 아니었기 때문에 난 죄책감을 느끼지 않소 내 생리가 그러하오 난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의 생기를 잃게 하오 내가 숨 쉴 때마..
길고 긴 계절의 편지를 쓰고 계단을 내려갔을 때였지, 코끼리 열차를 타고 온다는 라운지 밴드는 졸다가 가버렸고 담쟁이덩굴만 골목에 가득했어 난 여름의 마음을 담아 목각 인형을 풀어주었지 트로피컬 양산을 귀에 꽂고 잠자리 안경을 씌어주었어 떠돌이 악사를 찾아가, 산악 전차를 타고 다시 여름을 시작해 하늘나라 미술관에선 하트 모양의 펀치를 찍고 있었지 라일락의 마지막 꽃잎이 흩날리고 있었어, 사람들은 어떻게 여름을 살아갈까 마음이 지워질 때가지 얼마나 더 꽃잎을 모아야 할까 아무것도 미운 건 없었어 써야 할 이야기가 많아서, 지워야 할 이야기가 많아서 나는 또 대문을 닫겠지만 눈길이 닿는 곳마다 만난 적 없는 눈망울과 이 여름의 공기와, 에테르의,부서져 흩어지는 에테르의 바다 박상수, 여름의 에테르
혼자 있는 방을, 왜 나는 빈방이라고 부릅니까흰 접시의 외식(外食)도 흠집난 소반 위의 컵라면도 뱃속에 들어서는 같은 눈빛입니다죽기 살기로 살았더니 이만큼 살게 됐죠, 혼자 있을 때 켜는 텔레비전은 무엇을 위로합니까이만큼 살아서 죽어버린 것들은변기 안쪽이 붉게 물듭니다, 뜨겁던 컵라면의 속내도 벌겋게 젖었습니다커튼을 젖히자 날벌레같이 달려드는 햇빛들, 겨울은 겨울로 살기 위해 빈방을 찾습니다사랑을 믿기 때문에 사랑했습니까, 삶을 믿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밥을 안치려고, 손등은 쌀뜨물 속에서 뿌옇게 흐려집니다네가 없는 방을, 왜 나는 빈방이라고 불렀습니까 이현효, 배교
아마도 내가 당신을 잊어버린 것 같다, 그렇지 않고야 이렇게 잠 속에 든 당신 옆에 내가 누워 있겠는가, 이제 당신을 나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여기는 그림 속, 손을 잃어버린 새들이 날고 있다. 검은 부리를 가진 물고기들이 하늘을 향해 늙은 개들을 실어나르고 있다. 개들은 머리만 있고 얼굴은 없다. 지난 오후에 마을을 폭격한 거미 같다. 전갈도 어쩌면 잠자리처럼 부드러운 곡선으로 세계를 배회할지도 모르겠다. 여기는 그림 속, 대나무숲이 교회 옆에 있는 그림 속이다. 식당에서 내주는 작은 철근 한쪽을 씹어 먹는다. 가끔 내 주위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지렁이를 밟으며 옷 가게로 들어간다. 나무를 팔고 있는 옷 가게는 바다이다. 여기는 그림 속, 그 바다 안에서 우렁거리는 핵발전소에서 빛으로 엮은 목도리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