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캄한 그 어디에서도 지금 잡은 내 손을 놓지 마. 네가 실재하는 곳에 내가 있어야 해. 우린 불편한 영혼을 공유했잖아. 우리는 미래가 닮아있으니까. 나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서 좋아. 주머니에 늘 수면제를 넣고 다니는 습관까지. 칼자국이 희미해지지 않는 자해의 흔적까지. 유령처럼 하얗고 작은 발가락까지. 비릿하고 나쁜 꿈을 꾸고 일어나면 온 몸에 개미 떼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아. 나쁜 게 뭘까. 좋고 싫은 건 있어도 착하고 나쁜 건 모르겠어. 근데 오늘 우리는 나쁜 꿈속에 버려져 있는 것 같아. 세상에 너하고 나, 둘 뿐인 것 같아. 가위로 우리 둘만 오려내서 여기에 남겨진 것 같아. 이런 게 나쁜 거야? 난 차라리 다행인데. 유서를 쓸 땐 서로 번갈아가면서 쓰자. 네가 한 줄, 내가 한 줄, 이 개 같..
어느 날 떠나왔던 길에서 너무 멀리 왔다는 걸 깨달을 때. 모든 게 아득해 보일 때가 있다. 이럴 때 삶은 참혹하게 물이 빠져 버린 댐 가장자리의 붉은 지층이다. 도저히 기억되지 않으리라 믿었던 것들이 한눈에 드러나는 그 아득함. 한때는 뿌리였다가, 한때는 뼈였다가, 또 한때는 흙이었다가 이제는 지층이 되어 버린 것들, 그것들이 모두 아득하다. 예쁘장한 계단 어디에선가 사랑을 부풀리기도 했고, 사랑이 떠나면 체머리를 흔들기도 했다. 그래도 돌아온다고 믿었던 사랑은 없었다. 떠나면 그뿐, 사랑은 늘 황혼처럼 멀었다. 병든 것들은 늘 그랬다. 쉽게 칼날 같았고 쉽게 울었고 쉽게 무너졌다. 이미 병들었는데 또 무엇이 아팠을까. 병든 것들은 죽고 다시 오지 않았다. 병든 것들은 차오르는 물 속에서 죽음 이외에 ..
무대에서 내려왔어 꽃을 내미네 빨간 장미 한 송이 참 예쁜 애구나 뒤에서 웃고 있는 남자 한때 무지 좋아했던 사람 목사가 되었다 하네 이주 노동자들 모이는 교회라지 하도 괴롭혀서 도망치더니 이렇게 되었구나 하하하 그가 웃네 감격적인 해후야 비록 내가 낭송한 시라는 게 성직자에게 들려주긴 참 뭐한 거였지만 우린 조금 걸었어 슬며시 그의 딸 손을 잡았네 뭐가 이리 작고 부드러울까 장갑을 빼려다 그만두네 노란 코트에 반짝거리는 머리띠 큰 눈동자는 내 눈을 닮았구나 이 애 엄마는 아마 모를 거야 근처 미술관까지 차가운 저녁 바람 속을 걸어가네 휴관이라 적혀 있네 우리는 마주 보고 웃다가 헤어지려네 전화번호라도 물어볼까 그가 나를 위해 기도할 거라 하네 서로를 등지고 뛰어갔던 그 길에서 여기까지밖에 못 왔구나 서..
네가 죽어도 나는 죽지 않으리라 우리의 옛 맹세를 저버리지만 그때는 진실했으니,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거지 꽃이 피는 날엔 목련꽃 담밑에서 서성이고, 꽃이 질 땐 붉은 꽃나무 우거진 그늘로 옮겨가지 거기에서 나는 너의 애절을 통한할 뿐 나는 새로운 사랑의 가지에서 잠시 머물 뿐이니 이 잔인에 대해서 나는 아무 죄 없으니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걸 배고파서 먹었으니 어쩔 수 없었으니 남아일언이라도 나는 말과 행동이 다르니 단지, 변치 말자던 약속에는 절절했으니 나는 새로운 욕망에 사로잡힌 거지 운명이라고 해도 잡놈이라고 해도 나는, 지금, 순간 속에 있네 그대의 장구한 약속도 벌써 나는 잊었다네 그러나 모든 꽃들이 시든다고 해도 모든 진리가 인생의 덧없음을 속삭인다 해도 나는 말하고 싶네, 사랑한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