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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하고 발음해본 오후 세 시

목을 진동시키는 가벼운 떨림 같은 구름을 닮은 뭉클거림 같은 청량한 공기 같은 자작나무 숲의 아득함 같은 모슬린 옷의 설렘 같은 그리고 가벼운 눈물 같은

당신은 내가 처음으로 당도한 곳 아직도 내가 가보지 못한 곳 당신은 내 생에 대한 작심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장소 내 생의 오래된 책갈피 내가 겪은 일들의 전부

오늘은 당신 옆에 누운 봄날 오후 우리는 사랑을 지나 사랑으로 가고 있다네


사랑이 있나, 있기나 한 것인가.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사랑은 과연 사랑일까. 했던 사랑은 사랑이었나. 사랑했던 적이 있기나 한가.

사랑이 있나, 어쩌면 사랑이라는 말이 있을 뿐이겠지.

여름 한낮 참나리꽃은 섭섭한 일이 많다는 표정으로 서 있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어쩌면 아직 사랑이란 걸 못해봤을 수도. 그랬을 수도.

낮술에 눈부셔 걸음은 잠시 휘청댄다.


내 인생의 가장 큰 낭비는 당신, 여행 그리고 음악. 곧 사라지고 말 것들.

낭비하지 않고 어떻게 그것들을 기억할 수 있을까. 당신을 기다리는 데 사용했던 유용한 시간들.

당신을 기다리는 동안 내 그림자와 함께 낭비했던 시간들이여. 낭비하지 않고 어떻게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세계는 조금씩 변하고 있다. 한 시간에 한 시간만큼, 하루에 하루만큼.

그리고 나는 당신 쪽으로 더 가까이 가고 있다. 그림자가 길어지듯 당신에게 겹쳐가고 있다.

내일은 어떨까. 사라다빵을 오물거리며 당신이 물었을 때 나는 대답했다. 속으로.

하루만큼 당신에게 더 가까이 가 있겠지. 내일은 오늘보다 더 봄이렸다.


예쁜 화분이나 빗, 컵을 보면 예전엔 꼭 하나씩 샀다. 방에 두고, 서랍에 넣어두곤 했다.

얼마 전까진 두 개씩 샀다. 당신 하나 주려고 그랬다. 얼마나 예쁘던지, 하며 당신에게 건냈던 일본 에히메에서 사온 손수건.

지금은 다시 하나씩만 산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걸로도 충분하다 여겨서.

오늘도 기쁨이라면 그것뿐이라며 비닐로 꽁꽁 감아온 고양이 머그잔.


수국이 왕창 피었으니 곧 장마겠다. 마루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 슬그머니 미소 짓는 오후.

내일은 당신과 함께 쓸 우산을 골라봐야겠다. 하나면 되겠다.


솔직히 말해, 나는 당신을 몰라요. 당신이 좋아하는 음식과 당신이 좋아하는 그림과 당신이 좋아하는 날씨를 알지만 나는 당신을 몰라요. 아직 몰라요. 당신을 알기 위해 당신이 좋아하는 꽃과 나무와 강의 이름을 알려고 하지만 나는 아직 당신을 몰라요. 그래도 나는 당신을 사랑하죠. 어쩌면 당신을 오해해서, 당신을 오역해서,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건지도 모르죠.

나는 당신을 몰라요. 하지만 오늘도 나는 당신을 알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당신이 바라보는 방향을 보고 당신의 속도에 맞춰걷죠. 나는 당신의 젓가락질 습관을 알고 있어요. 당신이 뭔가를 생각할 때 고개가 얼마나 기우는지도 알고 있구요. 좋아하는 음악이 나올 때 발끝을 까딱거리는 것도, 모두가 잠든 밤 흑백영화를 혼자 보는 걸 좋아한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 이런 것까지 알 수 있을까요.

나는 당신을 알기 위해 노력할 거예요. 그게 사랑이니까요. 영원히 닿지 못할 수도 있지만 한 사랑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오늘. 조금씩 조금씩. 가질 순 없지만 다가가갈 순 있잖아요. 그래도 되는 거잖아요. 사랑은.


그렇군. 우리는 멀어지고 있었군. 움직이지 않는 듯, 하지만 조금 움직인 듯. 그걸 세월이라고 부를 수 있으려나.

아직도 지평선을 물들이던 그날의 노을이 잊히지가 않는데. 알게 모르게 우리는 서로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던 거지.

뒤돌아보면 지금도 우리는 멀어지고, 사라지고 있으니.

그러니까 사랑한다고 말해둘 것. 말할 수 있을 때 미리 말해둘 것.


잊기 위해 떠난다는 말은 죽어도 잊지 못하겠다는 말.

잊는 다는 말. 그저 말만 있을 뿐이겠지. 경험하면 알게 되죠. 잊을 순 없는 거라는 걸. 절대 그럴 순 없는 거라는 걸.

잊혀가는 거겠지. 아니면 희미해져가던가.


은유와 비유와 상징을 내던지고 명료하고 현실적인 사랑의 말만을 해야겠다고 다짐하던 밤들. 서로의 손을 놓지 않으려 애쓰며 걷던 시간들.

이제 괜찮을 거야, 하고는 떠나왔는데, 이제는 사랑이 떠나간 줄 알았는데, 사랑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서 창 너머 꽃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었구나.

혼자 있는 시간이 유난히 낯설고 손이 시리던 며칠. 물끄러미 지난 연애를 생각했던 며칠.

돌아가서는 당신에게, 사랑한다는 말보다 함께 떠나자는 말을 해야겠다.

사랑보다도 더 사랑한다는 말이 있다면 아마도 그것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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